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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혁명이 중남미에서 갖는 의미

중남미

by 쪼리아빠 2023. 2. 14.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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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문화의 정체성

멕시코는 스페인이 중남미 대륙을 정복할 때 아즈텍 왕국을 정복하고 가장 먼저 총독부를 세운 나라로, 중남미에서 가장 먼저 유럽문화를 받아들인 곳이고, 스페인 정부도 다른 중남미 국가들이 독립해 나갈 때에도 끝까지 식민지로 지켰던 나라이기도 하다. 독립 역사를 봐도, 스페인 정부군 소속 사령관이었던 크리오요인 이투르비데 Iturbide가 스페인 본국에서 벌어진 자유파 혁명에 반기를 들면서 독립전쟁에 성공했고, 이후 황제로 즉위하는 바람에 건국 영웅의 취급을 받지 못한다. 대신 초기에 독립을 주장하다가 초기에 목숨을 잃은 이달고 Hidalgo 신부와 모렐로스 Morelos 신부가 독립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중남미 국가 중에서 크리오요들이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에 가장 소극적이었던 곳이 멕시코와 페루인데, 이 두 나라는 인디오와 메스티소의 혼혈 비중이 매우 높아서, 독립 과정에서 크리오요들이 인디오들에게 경제적 기득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멕시코의 경우는 메스티소가 60%, 인디오 30%, 백인이 10% 정도로 구성되어 있고, 페루는 메스티소 40%, 인디오 45%, 백인 15% 정도로 구성되어 있어, 백인이 50% 정도를 차지하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 구성비율이 매우 다르다.  
멕시코는 특히 식민지배 초기에 스페인 남자들의 인디오 여성에 대한 혼혈을 정책적으로 추진하면서, 메스티소 Mestizo 라는 새로운 혼혈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메스티소는 엄마는 아메리카 인디오이고, 아빠는 스페인계 백인이지만,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전혀 물려받지 못하고, 멕시코의 노동을 담당하는 계층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들은 식민지 시절에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독립 이후에는 메스티소 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내면서 멕시코의 주류로서 당당히 자리를 잡게 된다. 

멕시코시티 삼문화광장(Plaza de las Tres Culturas). 1968년 민주화운동학살 장소이기도 하다.

멕시코시티 인근에는 아즈텍 문명의 유적지와 식민지 시절 스페인 양식의 학교, 그리고 현대식 외교부 빌딩으로 둘러싸인 삼문화 광장 Plaza de las Tres Culturas 이 있다. 이곳은 멕시코의 문화가 과거의 아스텍과 마야의 원주민 문명, 스페인과 같은 유럽 문명, 그리고 그 사이에서 새롭게 창조된 메스티소의 현대 문명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멕시코의 현재를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멕시코 혁명의 진행과정과 의미

한편, 멕시코의 크리오요들이 걱정했던 바와 같이, 멕시코는 중남미에서 가장 먼저 혁명이 일어나는 나라가 되었다. 독립 이후 멕시코는 제정, 공화정, 프랑스의 지배 등의 혼란를 겪었고, 프랑스를 몰아내는 데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정치적으로 혼란한 19세기를 보냈다. 프랑스 축출에 앞장섰던 최초의 원주민 출신 대통령인 자유파 베니토 후아레스 Benito Juarez는 1857년 취임 이후 교회와 크리오요가 독점했던 토지의 개혁과 같이 원주민의 권리 옹호에 나섰으나, 보수파의 요청으로 멕시코에 간섭한 프랑스와의 전쟁 중 사망하였다. 베니토 후아레스는 중남미 역사상 20세기까지 유일한 원주민 출신 대통령이기도 하다. 이후 30여 년간 집권한 뽀르피리오 디아스 Porfirio Diaz 는 전임자와는 달리 강력한 중앙집권제와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가톨릭 교회와 보수주의자와의 결탁을 통해 권력의 유지를 보장받았다. 
1910년, 정적이었던 프란시스코 마데로 Francisco Madero 를 투옥시키고 부정선거를 실시하면서 멕시코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탈옥에 성공한 마데로가 독재타도와 함께 혁명의 성공을 위해 토지개혁을 제안하면서 원주민 소작농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고, 마데로의 호소에 따라 여기서 그 유명한 판초 비야 Pancho Villa와 에밀리아노 사파타 Emiliano Zapata 가 등장하게 된다. 혁명 1년 만에 마데로는 새로운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집권하지만, 1913년 초에 우에르타 Huerta가 일으킨 친위쿠데타 이후 암살당한다. 

1914년 12월, 멕시코시티에 입성한 판초 비야와 에밀리아노 사파타.

쿠데타로 집권한 우에르타에 대항하는 베누스티아노 까란사 Venustiano Carranza 쪽에 비야, 사파타가 참여하고, 미국이 이들을 지원하면서 우에르타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후 집권한 까란사는 비야, 사파타와 대립하기도 했지만, 결국 1917년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새로운 헌법에서 자원국유화, 노동개혁, 토지개혁 등을 통해 여성, 노동자, 농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기틀을 마련하면서 혁명은 일단락된다. 한편, 이렇게 해서 당 이름에 혁명이 들어가는 제도혁명당(PRI, Partido de Revolución Institucional) 이 1929년에 탄생하고, 2000년까지 무려 70여 년간 장기집권을 하면서 멕시코 사회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는 달리 정치적으로는 비교적 안정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위의 두 문단으로 멕시코 혁명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등장인물들 각자가 대표하는 세력이 모두 다르고,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다만 꼭 기억했으면 하는 것은 비야와 사파타 같은 메스티소가 인디오 군대를 이끌고 멕시코 역사에 등장하여 처음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했다는 것이다. 토지개혁을 통해 교회와 일부 귀족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도록 하고, 인디오에게 토지를 돌려주는 시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멕시코는 아직도 토지개혁이 진행 중이라는 입장이기도 하고, 지금도 무장투쟁을 하고 있는 사파티스타 Zapatista 반군이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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