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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코스모폴리탄

중남미

by 쪼리아빠 2023. 3. 24.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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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의 2011년 인구조사에서, 전체 3천만 명 가량의 국민들 중 자신이 메스티조 또는 백인이라고 답한 비율은 각각 51.6%와 43.6%로, 합쳐서 95.2%가 자신이 백인계라고 답했다. 소수인종으로는 2.8%가 흑인, 2.6%가 인디언이라고 답했다. 한편, 2008년 한 대학의 DNA 유전자 조사에서는 베네수엘라 인구의 60.6%가 유럽 계통, 23%는 인디언, 16.3%는 아프리카의 비중이라는 조사가 있었다. 

 

베네수엘라의 인구구성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지금과 같은 인구구성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20세기 초 석유발견 이후라는 것이다. 유럽이나 중동에서 중남미로 대거 이민이 이뤄졌던 시기들을 보면, 기근이 심했거나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시기가 많은데, 베네수엘라는 거기에 더해 1970년대 석유산업의 호황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이를 메꾸고자 산유국 출신 기술자들의 이민을 많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다른 중남미에서는 볼 수 없는 아제르바이잔이나 에스토니아 출신의 이민자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석유산업 엔지니어의 급여는 어느 나라를 가도 비슷하다. 베네수엘라 경제 위기 이후 많은 엔지니어들이 급여수준이 높은 다른 나라로 떠나면서, 유지보수가 제때 이뤄지지 않아, 위기를 더 키웠다는 지적도 있다.

 

석유산업을 통해 주변국보다는 임금수준이 높았던 시절에는 콜롬비아, 에콰도르, 도미니카공화국 등 주변의 국가에서 베네수엘라로 이민을 오려는 수요가 많았고, 정부에서도 저임금의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어서, 이민자들에게 유화적인 정책을 고수하였다. 특히, 콜롬비아의 경우는 60년대 이후 계속된 내전으로 인해 난민 신세로 베네수엘라에 들어온 숫자도 50만에서 100만 명 사이인 것으로 추산된다. 베네수엘라 내 콜롬비아 출신자들은 500만 명이 넘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물론 2010년대 베네수엘라의 경제위기 이후 콜롬비아로 넘어간 베네수엘라 난민의 숫자도 200만 명에 달한다. 중남미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중국적을 허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한편, 중남미 여러 국가에 살면서 느꼈던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중남미 사람들은 평소에는 애국심을 드러내는 일이 좀처럼 없지만, 딱 한 가지 경우에는 세상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도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다는 것이다. 바로 축구다. 평소에는 자기 나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기회가 별로 없지만, 축구 만큼은 중남미 국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브라질-아르헨티나 축구전은 세계 최대의 관심사 중 하나이다. 축구팬들은 상대국에서 열리는 경기를 보기 위해 상파울루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36시간의 버스여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난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시드배정표를 보면, 그 넓은 아시아와 유럽은 각각 하나의 지역으로 묶이는 데 반해, 미주대륙은 북·중미·카리브와 남미, 이렇게 둘로 나뉜다. 미주를 하나로 묶어버리면, 남미의 축구강국들에 밀려서 미국이 월드컵 본선에 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만들어진 제도이다. 남미의 쿼터는 총 10개 국가가 경쟁을 해서, 그 중 4.5장의 진출시드를 받는다. 상위 4개 국가는 바로 본선으로 올라가고, 5위 팀은 아시아·대양주 승리팀과 플레이오프를 통해 본선에 진출한다. 2022년 월드컵에서는 남미 5위인 페루가 호주에 패해서, 최종적으로 남미에서 4개 국가가 본선에 진출했다. 

 

남미 10개 국가에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할 가능성은 거의 50%에 이른다고 보면 맞다. 그럼, 남미 10개 국가 중에서 아직 한 번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보지 못한 나라는 몇 개국이나 될까? 딱 한 나라만이 아직까지 월드컵 본선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바로 베네수엘라다. 하지만, 월드컵 시즌이 되면, 축구의 대륙, 남미답게 베네수엘라 역시 축구응원의 열풍에 빠진다. 다만 응원하는 국가는 베네수엘라가 아니다.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응원할 나라를 찾는다. 그래서 월드컵 시즌에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의 주점에 가면, 스페인을 응원하는 사람들과 이탈리아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광경도 목격할 수가 있다.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미주대륙 국가들이 이중국적을 허용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원래 출신국가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고, 여차하면 출신국가의 대사관으로 달려가 시민권 회복절차를 밟는 경우도 많다.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 때도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 이탈리아 대사관에 몰렸다는 뉴스가 나온 적도 있다. 단일국가라는 우리의 눈으로 보면 국가관이 너무 가볍지 않나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국가가 애국심이라는 교육을 소홀히 한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 수 있다. 

 

2017년 7월 대규모 시위 이후, 카라카스의 스페인영사관 앞에 늘어선 줄.

 

하지만, 중남미 얘기를 하면서 여러 번 강조하였듯이, 우리가 정상이고, 베네수엘라가 비정상이냐 라는 질문은 쉽게 답하기 어렵다. 오히려 중남미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베네수엘라가 정상이고, 우리가 비정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한국인으로서의 뿌리를 잊지말아야 한다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중남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조상들이 조국을 등지고 베네수엘라로 건너온 지가 100년이 넘었다고 해서, 그들의 조국이 베네수엘라로 바뀌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중남미 사람들에게 있어, 조국이나 애국의 개념이 우리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인디언의 경우도, 페루 산악지대의 원주민에게는 자신의 조국이 잉카제국이고, 지금의 페루는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이어받은 크리오요들의 지배수단일 수도 있다. 실제로 페루에는 아직도 잉카제국의 부활을 희망하는 MRTA(뚜빡 아마루 혁명운동) 세력이 존재한다. 일제 시대 조선의 독립을 꿈꾸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1996년 12월, 주페루 일본대사관저 인질극을 벌인 조직이 바로 MRTA이다.

 

중남미 사람들과 비즈니스를 할 때 드는 생각은 비즈니스를 통해 국가경제에 기여한다는 생각은 거의 없어보인다는 점이다. 대신 자신이나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 비즈니스의 목적이 된다. 대신에 활동무대는 넓어진다. 자기 나라의 경계를 뛰어넘어 전 세계를 무대로 사업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점에서는 창의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나라도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이 자리잡은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라고 한다. 간도나 연해주로 이주해서 살아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중남미 사람들은 더 그렇다. 어디에서 살더라도 굶주리는 일은 잘 없지만, 어느 나라로 가더라도 언어와 문화에 불편함이 없어서, 딱히 나라와 국경이라는 것에 얽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돈이 필요하다면 중남미 다른 나라 뿐만 아니라 미국에 가서 일을 해도 된다. 대개 아는 사람의 소개로 일자리를 구하기 때문에 불법체류자라도 딱히 범죄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쫓겨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코스모폴리탄으로 사는 것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더 정상적인 개념일 것이다. 

 

다음 번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 남미의 쿼터는 6.5장으로 늘어난다. 코스모폴리탄 베네수엘라도 다음에는 월드컵 본선에서 자기 나라를 목놓아 응원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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